보이스피싱은 암(癌)과 닮았다. 암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다가 새로운 돌연변이를 만든다. 그러면 기존 치료제는 약발이 받질 않는다. 암세포는 스멀스멀 퍼져나간다. 암을 ‘진화하는 생명체’라고 부르는 이유다. 보이스피싱이란 사기범죄도 한국에 처음 보고된 이후로 돌연변이를 만들면서 환경에 대응했다. 정부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대응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이유다.
코로나19가 퍼진 2020년엔 보이스피싱 범죄가 또 진화했다. 전염병이 퍼지며 비대면은 일상의 기본양식으로 자리잡았지만 보이스피싱 만큼은 ‘대면’이 대세가 됐다. 피해자를 직접 만난다. 패러다임이 바뀐 셈이다.
그러면서 ‘심부름꾼’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받았다.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이들을 ‘현금 수금책’이라 부른다. 보이스피싱의 수뇌부는 음지로 더 숨어들었다. 수금책 노릇을 한 사람들 가운데엔 평범한 청년들이 대거 섞여 들었다.
대면편취(對面騙取). ‘얼굴을 마주한 채로 재물을 빼앗다’는 의미다.
헤럴드경제가 국회 오영환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을 통해 확보한 경찰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를 통틀어 발생한 보이스피싱 대면편취 사건은 1만5111건. 경찰이 분류하는 8가지 보이스피싱 피해유형 가운데 47.7%를 차지했다. 2019년 발생건수(3244건)와 견주면 365% 늘었다.
전염병 국면이 이어지며 거리두기가 강화된 올해는 더 활개를 치고 있다. 올 들어 8월 말까지 1만6840건의 대면편취 사건이 보고됐다. 이미 지난해 1년치를 넘어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대면편취 범행이 이어지고 있다. 연말에 집계될 통계치는 사상 최고 수준이 확실하다.
대면편취 유형은 ‘보이스피싱=비대면 사기’라는 등식을 깨뜨린다. 그간 보이스피싱 범죄의 근간은 계좌이체였다. 조직원이 전화로 접근해 검찰청 검사나 금감원 직원을 사칭한 뒤 여러 구실을 내세워 피해자가 돈을 송금하게 유도하는 식이다. 이른바 ‘그놈 목소리’만으로 그간은 범죄피해가 성립됐다.
2020년은 이 양상이 완전히 뒤집혀진 해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비대면 계좌이체 유형의 발생건은 2019년 3만517건에서 2020년 1만596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대면편취 유형은 3배 가까이 불었다. 보이스피싱 범죄 경향이 뒤집어진 셈이다. 사람이 대포통장(사기금융계좌) 역할을 수행하는 꼴이 됐다.
수사기관은 대포통장 수급문제에서 원인을 찾는다. 블랙마켓(암시장)에서 범죄에 활용할 대포통장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대포통장은 조직이 범죄수익금을 손에 쥐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대포통장 유통조직이 보이스피싱 쪽으론 공급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수사관은 “보이스피싱 대포통장은 명의자 입건하면 입출금 내역이 있는 관련계좌가 모두 동결된다. 금융당국, 금융사들이 강력하게 대응한 결과”라면서 “리스크가 커지다보니 보이스피싱 쪽 공급이 말랐다”고 말했다.
개인 계좌를 사고 파는 것이 불법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도 신규 대포통장 공급이 어려워진 배경이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들도 자체적으로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구축하면서 사기계좌를 예전보다 효과적으로 골라내고 있다.
현금 수거책, 현금 전달책, 행동책.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돈을 받은 뒤 무통장입금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여러 단어들이다. 헤럴드경제는 이 가운데 사법부에서 주로 쓰는 ‘현금 수거책’으로 용어를 통일하기로 했다.
취재팀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현금 수거책의 인구통계학적 배경(연령대·직업·가담경로·구속유무)을 살폈다. 서울광진경찰서 홍순민 강력팀장(경감)이 2020년 4월부터 올해 3월 말까지 서울 31개 경찰서에서 붙잡은 현금 수거책 578명의 검거보고서를 전수분석해 취재팀에 단독 제공했다.
연령을 보면 20대가 208명으로 전체의 36%를 차지했다. 30대는 103명(17.8%)이었다. 검거된 현금 수거책의 53.8%가 2030세대인 셈이다. 10대도 27명(4.7%) 있었다.
일정한 일자리가 없는 이들이 대거 연루됐다. 498명이 검거 당시 ‘무직’ 상태였다. 전체의 86.2%에 달한다. 경찰은 아르바이트 등 임시직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도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무직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학생/학생은 23명(4.0%) ▷회사원 12명(2.1%) ▷자영업 8명(1.4%) ▷일용직 6명(1.0%) ▷유통업 3명(0.5%) 등이 뒤를 이었다.
분석 대상이 된 578명 가운데 97.6%(564명)이 “구인광고를 보고 연루됐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분류하는 구인광고는 온라인 SNS 채널(네이버 밴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과 구인구직플랫폼(알바천국, 알바몬 등)에 게재된 일자리 정보를 뜻한다. 이는 붙잡힌 현금 수거책들이 애초에 보이스피싱 조직을 알고 있거나 관여하던 이들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병찬 법무법인 파트너스 대표변호사는 “말 그대로 이들은 ‘인간 대포통장’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지금껏 300여건의 보이스피싱 사건에 관여했던 이 변호사는 “뉴스 볼 시간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잘 모르는데, 경제적으로 취약해서 대출은 안 나오고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다.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며 안방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며칠 전 군 입대를 앞두고 게임만 하는 아들이 답답해 “군대 가기 전에 사회 경험이라도 쌓으라”며 윽박질렀던 터였다.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하늘의 별 따기”라며 입을 비쭉거렸다. 작년 초만 해도 코로나 확산 초기였기에 구직사이트에 올라오는 공고는 지게차 운전, 냉동창고 작업 등이 전부인지라 선택지가 없었다.
아들이 구했다는 일은 “대금을 회수하는 대부업체 사무직”이라고 했다. 대부업이라니…. 영화 속 깡패가 떠올라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곤 “그런 거 하다 칼빵 맞는다”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들은 “세상에 편한 일이 어디있냐”며 맞받았다. 며칠 후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면서 새벽부터 일을 나갔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로부터 2주 후. 아들이 목걸이를 건넸다. “엄마 생일선물로 금붙이 사줘”라며 장난삼아 던진 말을 기억한 것이었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녀석, 알바비 얼마나 된다고….’ 아들은 찔리는 듯 “사실 호기심에 대부업체 일을 시작했다”고 실토했다. 이번에도 “미쳤냐”며 소리쳤다. 목걸이는 환불시켰다. “일주일 내로 그만두겠다”는 아들의 약속을 받고서야 놓아주었다.
유난히 아들 걱정이 많았다. 여리고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살집이 있고 눈이 작아서 별명이 ‘100㎏ 아메바’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겉돌더니 친구들의 표적이 됐다. 체육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교복이 없어졌다. 머리에 돌을 맞기도 했다. 맞고 들어오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말도 못 할 정도로 괴로웠다. 아이를 대안학교로 전학 보낸 후에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버릇처럼 딸에게 “엄마 죽으면 오빠가 사기당하지 않게 잘 챙겨줘라”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된 것 같다.
올해 초였다. 겨우 전셋집 계약을 마친 뒤 들뜬 기분으로 학창 시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늦은 밤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서인데요, 아드님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습니다”라고 했다. “선생님 잘못 거신 거 아녜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경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해 전화를 탁 끊었다. 이상하게 불안감이 밀려왔다. 걸려온 번호를 검색해 보니 경찰서가 틀림없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다음 달 새벽같이 경찰서로 향했다. 유치장 너머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애지중지하던 고양이가 죽어도 울지 않던 아이였다. “정말 몰랐어. 몰랐어. 미안해” 아들이 바닥을 보며 웅얼거렸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가시덤불이 들어찬 듯 목이 메었다. “뭔가 잘못된 거야…. 엄마가 꺼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아들에게 말했다.
경찰은 아들이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이라고 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본 구직 사이트에는 ‘대부업체 채권추심팀의 수금 업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상호와 도장이 찍힌 서류도 확인했다. 그들은 “부실채권을 회수하는 일”이라며 “고객을 만나 현금을 받고 지정된 계좌로 입금하면 된다”고 했다. 고액을 다루는 일이기에 신분증·주민등록초본 등도 보내라고 했다. 의례적인 취업 절차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들을 전국으로 보냈다. 약속 장소에 가면 고객들이 먼저 아들을 알아보곤 현금다발을 손에 쥐여줬다. 고객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전화를 하며 한순간도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아들과 말 섞을 틈조차 없었다. 아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신용보증협력서·대출금상환확인서 등 미리 받은 서류를 건넸다. 일종의 ‘영수증’이었다. 그러곤 은행 ATM으로 이동해 무통장 입금을 했다. 현금이 구겨져 입금이 잘 되지 않으면 직접 은행 직원에게 문의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꾸물거리면 고객들의 이자가 늘어난다”며 아들을 재촉했다. 하루에 두 탕, 세 탕도 뛰었다. 처음엔 일급, 나중엔 수수료를 수당으로 받았다. 1월 초부터 열흘 사이에 10명이 넘는 고객을 만났다. 아들은 정상적인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자신의 카드로 여러 번 택시 비용을 결제하고, 코로나 명부에 실명과 번호를 남겼다. 범죄라고 생각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이 붙잡힌 건 강원도의 한 은행이었다. 받은 돈을 무통장 입금하고 있었다. 마침 출금하러 온 경찰이 이상하게 여겨 “혹시 보이스피싱 피해자냐”고 물었다. 아들은 “대금업체 수금 아르바이트를 하고있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긴급 체포됐다. 지역 신문에 ‘보이스피싱 조직원 검거’라는 기사가 났다. 회사와 상사의 이름. 영수증으로 건넸던 서류. 모든 것이 위조된 가짜였다. 피해금액 수억 원을 전달받은 보이스피싱 총책은 이미 잠적한 뒤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경찰은 아들이 보이스피싱 공범이라고 했다. 아들도 가짜 취업 정보에 속아서 당한 거라고 해도 듣질 않았다. 다행히 구속되진 않았다. 인터넷을 뒤지니 아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취준생·직장인·자영업자…. 생계 전선에 뛰어든 평범한 사람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재판에 올랐다. 보이스피싱 총책은 중국에 있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들 같은 피의자들은 총책이 가로챈 피해 금액을 합의금으로 물어주고도 실형을 산다고 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들을 붙잡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일을 하라고 보채지만 않았어도….’ 아들의 앞길을 망쳤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어 수면제를 여러 알 삼키기까지 했다. 극단적인 선택만 두 번. 한 달 사이 12kg가 빠져 앙상해졌다. 잘 들리지도 않고, 또렷이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공황발작이 와서 36시간 동안 고장 난 경운기처럼 온몸을 떨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딸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아들은 그만 포기하자고 한다. 하루 종일 식물인간처럼 침대 위에서 숨만 쉰다. 정신과를 찾은 아들은 우울증, 공황장애, 성격신경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루에 약을 수 알 삼키지만 살아있는 악몽은 끝날 줄 모른다. 복학 후 대기업에 취직하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버렸다. 이따금 “교도소에 5년씩 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릴까”라고 하다가도 “마음을 비웠다”며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다. “교도소 갔다 와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다독이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다.
검찰은 아들을 8개 혐의로 기소했다. 사기 · 공문서위조 · 사문서위조 · 위조공문서행사 · 위조사문서행사. 참담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애지중지 키웠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앞길이 창창했던 아들이 한순간에 전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라렸다. 순백 같은 아이를 걸레짝처럼 닳도록 쓰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만 같다.
정일훈(63ㆍ남) 씨는 7년을 울산의 조선소에서 협력업체 소속 ‘보온공’으로 일했다. 집채만한 배 속에 씨줄날줄로 퍼진 배관에 보온재를 붙이는 노동이었다. 선박을 기어다니시피 하면서 보온재를 덮는 건 고역이다. 그래도 일감은 풍부했고 꾸준히 소득이 들어왔다. 몇년 전 불어닥친 조선업 불황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호시절은 끝났다. 하청업체를 나와 일용직으로 보온공 일을 이어가던 정 씨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화물차 운전, 인체실험, 쿠팡 배송…. 그는 관심있게 본 구직공고 목록을 작성했다. 거기엔 ‘SBI솔루션’이라고도 적혔다. 생활정보지 교차로에서 유심히 봐둔 업체명이었다.
SBI솔루션의 채용 담당자는 정 씨와 연락하면서 “채권추심 업무”라고 소개했다. 사채를 끌어와서 하는 불법적인 일은 아닌지, 제3자가 돈을 받아 입금하는 이유는 뭔지 등을 정 씨가 꼼꼼히 물었더니 “고객들이 이미 신용불량이 돼서 통장 압류되고 현금으로 할 수밖에 없다. 고려신용정보에서 위탁받은 회사”라고 설명했다. 세무서장 직인까지 찍힌 사업자등록증도 보여줬다.
그것은 취업의 허울을 쓴 범죄 심부름꾼 모집 광고였다. 그는 검찰로부터 ‘보이스피싱 조직과 공모한 공동정범’이라는 취지로 기소(사기혐의)됐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정 씨는 지난해 9월 진주교도소에 미결수로 수감됐다. 피고 측은 “형이 너무 과하다”고, 검사 측은 “형이 약하다”고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정 씨의 변호인은 현재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정 씨와 같은 중장년층들이 보이스피싱에 연루돼 붙잡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헤럴드경제가 확보한 서울지방경찰청의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검거보고서 분석자료를 보면, 2020년 4월~2021년 3월 사이에 붙잡힌 피의자 578명(서울지방경찰청 관내) 가운데 40대 이상 가담자는 41.6%(240명)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엔 40대 이상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2018년 2월~2020년 3월 사이에 검거된 현금 수거책 559명을 연령대로 분류했을 때 40대 이상 피의자는 15%에 그쳤다. 현금 수거책으로 가담했단 이유로 붙잡힌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대였다. 2~3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 심부름꾼 노릇은 비교적 젊은층에서 많이 했다면, 2020년 2분기가 지나면서 연루되는 이들의 연령대가 높아졌다.
검거보고서를 분석한 홍순민 서울광진서 형사팀장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알바) 광고를 엄청 때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엄청나게 줄어들고 수입이 불규칙한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쉬운 일이다. 수금하는 일이다. 일당은 최저시급보다 많이 처주겠다’는 내용으로 현혹한 결과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중장년층이든 청년층이든 보이스피싱 행동책으로 엮이는 배경은 ‘취업’이다. 당장 일자리가 절박한 이들이 보이스피싱 일당이 쳐둔 거미줄에 걸린다. 다만 20~30대가 취업정보를 알바몬, 알바천국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구인구직플랫폼에서 찾았다면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교차로, 벼룩시장 같은 생활정보지를 통해 취업정보를 접한다.
보이스피싱 수금책을 것으로 의심되는 광고들은 대개 ‘단기/장기 배달 알바모집’, ‘단순배송 구함’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업무를 담당할 것인지는 대체로 명시하지 않는다. ‘초보 환영’, ‘나이무관’, ‘일급 지급’ 등의 문구로 일단 유인한 뒤, 유선이나 카카오톡 등을 통해 구체적인 업무를 설명하며 포섭하는 구조다.
이원일 변호사(법무법인 하진)는 “생활정보지 한 부를 펼치면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광고가 8~9개쯤 된다”며 “교차로 같은 익히 알려진 매체에 불법적인 광고가 실리라곤 생각치도 못하는 허점이 있다”고 말했다.
①단계 보이스피싱 콜센터에선 구직사이트 등에 일자리를 미끼로 ‘현금 수금책’ 물색. 주로 ‘채권회수(추심)’, ‘법률사무소 외근직’, ‘부동산경매 보조업무’ 등으로 위장. 구직자들은 이런 공고를 보고 인사 담당자(실제론 보이스피싱 조직)와 접촉. 그들은 ▷단순 보조 ▷일당 지급 ▷정규직 전환 가능 등의 조건으로 현혹.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면접으로 갈음한다”며 즉시 일하도록 유도. 사업자등록증 등을 요구하는 일부 구직자들에겐 그럴싸하게 조작된 문서를 제시
②단계 보이스피싱 조직은 동시에 ‘피해자’를 물색. 전화로 금융기관, 수사기관을 사칭하면서 수백~수천만원을 빨리 입금하도록 교묘하게 꾀어내는 방식.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로는 금융사를 사칭해 대환대출, 자영업자대출을 안내하는 미끼 문자가 극성. 대출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은 피해자 1차 타깃이됨. 보이스피싱 조직은 이 과정에서 대출신청 앱이라며 악성프로그램(스마트폰 원격조정 앱)을 설치하도록 유도. 이후 “우리 대출상품을 이용하려면 타 금융사의 기존 대출을 먼저 상환해야 한다”는 등의 구실 제시. 피해자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추심팀 직원 보낼테니 직접 상환하시라”고 안내
③단계 피해자와 현금 수금책 노릇을 하는 이들이 실제 대면하는 단계. 피해자와 수금책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무대’에 서는 셈. 피해자는 기존 대출금을 금융사 직원에게 직접 갚는 것으로 인지, 동시에 수금책은 고객의 대출금을 수금(혹은 기타 합법적 자금)하는 상황으로 인지함. 피해자가 돈을 건네면 수금책은 미리 보이스피싱 조직이 일러준 계좌번호로 무통장송금하고 대면편취 범행이 완성됨
송지민 씨의 사례는 지난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대면편취’ 스타일 보이스피싱의 매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는 헤럴드경제가 지난 8~9월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현금 수거책 피의자 14명 가운데 한 명이다. 송 씨를 포함한 8명은 현재 관련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4명은 경찰, 검찰 수사 중. 나머지는 형 집행을 완료한 상태다.
취재팀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일자리를 접했고 실제로 일을 했는지 정리했다. 그러면서 대면편취 보이스피싱의 작동하는 ‘삼각구조’를 확인했다.
2019년까지 3244건에 그쳤다가, 지난해 들어선 1만5111건으로 폭증한 대면편취형 보이스피싱은 한 축엔 이른바 심부름꾼이 반드시 필요하다. 피해자를 만나서 돈을 받은 뒤 계좌로 입금하는 역할을 해야해서다. 그걸 보이스피싱 조직의 내부사정을 아는 인물에게 맡길 순 없다. 경찰에 붙잡히더라도 조직 본체엔 손상을 주지 않을 ‘도마뱀 꼬리’가 필요하다. 때문에 일반인 수요가 생긴다.
박현근 변호사는 “세상물정 모르는 20대를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무제한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수거책은 말 그대로 쓰다가 쓸모 없어지면 버리는 도구에 그친다. 새 인력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공급된다”고 말했다.
취재팀이 만난 14명의 사례자들은 보이스피싱에 연루되기 직전에 공통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 가운데 7명은 알바몬, 알바천국, 벼룩시장 같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통해 ‘채권 회수’ 혹은 ‘채권 추심’ 아르바이트라는 안내를 보고 구인공고에 접근했다. ‘법률사무소 외근직 아르바이트’, ‘부동산경매업무’ 같은 제목이 달린 구인공고를 보고 엮이게 된 이들도 있다. 최근엔 중개사무소 외근직이라는 허울로 “고객들이 다운계약서를 써서 계약금을 현금으로 받아야 한다”고 구직자를 유인한다.
이 밖에 ▷네이버 밴드(2명) ▷네이버 카페(1명) ▷온라인 구인 광고(3명) ▷온라인 게임(1명) 등을 통해서 일자리 정보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보이스피싱에 연루됐다.
송대인(38·가명) 씨는 지난해 한 지역언론이 운영하는 취업정보 사이트에서 (주)○○파이낸스 명의의 구인공고를 봤다. 거기엔 경매물건조사 또는 채권회수업무를 맡게 된다고 돼 있었다. 송 씨는 인사담당자라는 이와 연락하면서 경매물건조사 업무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그건 당장 일거리가 없어서 일단 채권회수 업무를 해보시라”고 권했다.
송 씨는 “돌이켜 보면 경매물건조사라는 건 미끼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누구나 알고 믿는 사이트에 합법적 알바를 가장해 보이스피싱 전달책을 모집하는 글이 올라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미끼로 평범한 시민들을 전달책으로 섭외한 보이스피싱 조직은 다른 한 편에선 피해자를 물색한다. 삼각구조를 완성하는 다른 축이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상징적인 사례인 검사, 금융감독원 사칭은 줄었다. 대신 은행, 카드사 등을 빙자해 대출상품을 안내하는 방식이 증가했다. 코로나19로 돈 필요한 사람이 많이지면서 피해자가 늘었다.
이병찬 변호사는 “작년, 올해 벌어진 사건의 90%는 코로나 긴급대출, 저금리 대환대출 등을 운운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현금을 건네받기로 한 사람(수거책)과 피해자는 대면하지만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자-피의자에게 각기 다른 거짓정보를 주면서 롤(역할)을 부여하는 셈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이들이 약속된 장소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 불필요한 소통을 하지 않도록 애쓴다.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은 피해자를 통화로 계속 붙잡고 있는 식이다. “우리 직원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댄다.
취재팀이 만난 피의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안녕하세요 하자마자 돈이 든 가방을 건네줬어요. 그분은 계속 통화 중이어서 다른 말은 못했어요.”
“담당자가 ‘고객이 통화 중인 상태로 만나기 때문에 인사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대화 할 시간조차 없어요. 피해자는 통화는 하고 있는 상태고 저도 통화 중이죠. 서로 OOO맞으세요? 하고 고개만 끄덕이면 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