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신분’으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고객 4명을 만났다. 회사 담당자가 일러준 약속장소에 나가면 고객들은 늘 전화통화 중이었다. “파인대부의 OOO입니다” 하고 인사하면 그들은 통화 중인 전화기를 건넸다. 수화기 속 직원은 “OOO 씨 맞죠? 회수금은 계좌로 입금해주시고요, 다시 고객님 바꿔주세요”라고 했다. 그러고선 돈봉투를 건네받고 은행 ATM에서 무통장 입금을 했다. 모두 4200만원이었다.
경찰에 가서야 그게 보이스피싱임을 알았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는 ‘대면 편취’라는 방식이었다. 일자리를 제안한 ‘김 형’이란 자는 조직원이었다. 처음 수사를 담당한 경찰서의 형사는 “왜 서울까지 와서 사고를 치느냐. (보이스피싱인지) 모를 수가 없다”며 윽박질렀다. “(몸통은) 잡을 인력도 잡을 능력도 없다”는 말까지 듣자 멘털이 무너졌다.
최씨는 수원에서의 소동 이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2주간 폐쇄 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이 시기를 다시 떠올리길 힘들어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수차례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의 변호를 맡은 이원일 변호사는 병원에서 의뢰인을 면접했을 때를 회상했다. 이 변호사는 “(정신병원에 있다고 하니) 편견을 가지고 만났는데 실제론 공손하고 예의 있더라. 이렇게 될 사람이 아닌데, (보이스피싱에) 연루되니 스트레스가 그만큼 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최씨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그를 보이스피싱 ‘공동 정범’으로 판단했다. 4건의 범행은 서로다른 검찰에서 수사가 이뤄졌다. 때문에 재판도 나뉘어 진행됐다. 1건은 서울에서, 나머지 3건은 울산이었다. 이 변호사는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폈다.
“피고인 최윤서는 무죄.”
지난 4월 중순 서울 동부지법에서 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판사가 주문을 읽자 최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법원 복도에서 한 시간을 울었다. “‘무죄’는 생각도 안 했어요. 심리적으로 잔뜩 웅크린 채로 갔기 때문에 감정이 더 복받쳤습니다.”
판사는 판결문에 “제출된 증거만으론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에 고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적었다.
재판부는 ‘김 형’이라는 사람이 요구한 취업서류(신분증 사본, 가족관계증명서 등)를 모두 건넨 점, 주변에 “취직했다”며 자랑하는 메신저 내용 등에 주목했다. 합의금을 마련해 건넨 것도 참작됐다.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은 “누가 봐도 평범한 직장인 같았다. 피고(최씨)가 취업 사기를 당해 돈을 받아갔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무죄가 한 번 나왔다고 끝은 아니다. 모든 사법 절차를 언제 마칠지 모른다. 울산지법에서 진행되는 다른 재판에선 최씨에게 징역 10월이 선고됐다. 무죄가 나온 동부지법 재판은 2심(항소심)으로 넘겨졌다. 항소심 재판부의 선고는 12월로 예정됐다. 무죄가 뒤집힐 수도 있다.
대학 시절 학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발하던 최씨는 사건이 터지고 꼬박 1년을 은둔자로 살고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20년지기 친구와의 관계도 끊었다. 하루 두 번 약봉지와 씨름을 한다.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 수면제 따위를 12알 삼킨다. 그는 “딱히 약 부작용은 없는데 끊으면 불안 증상이 심해지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정서 상태는 최악에선 벗어났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갉아먹지 않도록 애쓴다.
“처음 입건됐을 땐 ‘평범한 제약회사 직장인이란 소박한 꿈, 미래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이미 저질러진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일을 했던) 그 시간대를 조각내서 통째로 드러내는 거예요. 제 시간을 버리지 말아야죠.”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연루된 이들의 절반 이상이 이른바 ‘관계자본’이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기관에 붙잡히더라도 가족 외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곳이 없어서 홀로 대응하거나 온라인 공간에 의지한 이들도 10명 중 4명이었다.
헤럴드경제는 이들의 개인적, 사회적 배경과 정서적 영향을 파악하고자 네이버 카페 ‘보이스피싱 피의자’ 회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8월24일~9월3일)를 벌였다. 104명이 참여했고 중복응답(2명)을 제외한 102명(사건 당사자 91명·가족 11명)의 응답값을 분석했다. 설문조사 분석 과정에서는 장동호 남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과)가 도움을 주었다.
응답자 가운데 38명(37.3%)은 일자리를 찾았던 이유로 ‘일을 하고 있었으나 소득 부족했음’을 이유로 들었다. 추가 일거리를 찾다가 소위 가짜 구인정보를 접한 것이다. 응답자의 22.5%는 ‘기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고 답했다. 8.8%는 ‘정규직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임시직을 물색했다고 했다.
이들이 접한 구인정보는 누구나 알만한 구인구직 플랫폼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네이버 밴드·카페,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SNS 채널에서도 평범한 일자리로 포장된 ‘가짜정보’가 널려 있다.
응답자들이 피의자가 된 주된 배경은 대포통장 제공(44.1%)과 현금 수금책(31.4%)이었다.
대포통장(계좌정보 제공)은 여러 경로로 촉발된다. 대개는 대출을 빙자한 사기다. 금융사 명의를 내세워 ‘신용대출 가능’ 문자를 뿌린 뒤 걸려든 이에게 “적용금리를 낮추려면 신용점수를 높여야 한다. 계좌정보를 알려달라”고 구실을 대 체크카드나 통장비밀번호 등을 제공하는 식이다. 계좌정보를 넘기고 그게 보이스피싱에 이용되면 통장 소유자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는다.
현금 수금책은 채권추심, 부동산경매업체 보조 등의 정상업무로 알고 일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돈을 수거해 전달책 역할을 한 경우다. 대부분 사기,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다.
설문에 응한 피의자들에게선 빈약한 ‘관계자본’도 공통점으로 발견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가족 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56.9%(58명)가 “없다”고 했다.
이는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생활비 등이 절실한 상황에서 가족의 조력이나 제도권 대출을 이용할 수 없다면 일수 같은 사채에 손을 대기 쉽다. 또한 허위 구직정보에 적힌 ‘고수익 알바’, ‘단기 업무’, ‘일당 지급’ 같은 문구에도 취약해질 수 있다.
장동호 교수는 “재무적 의사결정은 통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면서 “청년일수록 고립된 이들이 많고 그러면서 혼자 (위험한) 의사결정하는 사례가 많아진다”고 말했다.
응답자의 45.1%(46명)은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검거된 뒤 직계가족이나 친인척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고 답했다. 17.6%는 온라인(SNS, 채팅 등)에 도움을 구했다고 했고, 14.7%는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답했다. ▷‘친구·선후배’(7.8%) ▷변호사(7.8%) ▷현재 또는 과거 직장동료(1.0%) 등에게 SOS를 쳤다는 응답은 10%에 못 미쳤다.
응답자의 45.1%(46명)은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뒤 직계가족이나 친인척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고 답했다. 17.6%는 온라인(SNS 게시판, 채팅 등)에 도움을 구했다고 했고, 14.7%는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답했다.
‘친구·선후배’(7.8%) ▷변호사(7.8%) ▷현재 또는 과거 직장동료(1.0%) 등에게 SOS를 쳤다는 응답은 10%에 못 미쳤다.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엮인 뒤 사회적 관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라는 설문 문항에 응답자 41.2%(42명)가 ‘매우 축소됐다’고 답했다. 취재팀은 ‘코로나19가 퍼진 이후로 사회적 관계가 변화했는가’도 물었다. 이 질문에 매우 축소됐다고 응답한 비율은 35.5%로 첫 번째 질문보다 낮았다.
응답자들은 자괴감과 죄책감, 두려움 등이 뒤섞인 감정을 호소했다. ‘피의자=범죄자’라는 사회적 인식에 좌절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드러내긴 쉽지 않다. 수천만원을 잃은 엄연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 가담자도 엄벌한다’는 현재의 형사정책적 기조에서는 일단 피의자로 입건되면 처벌을 피하긴 어렵다.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관계마저 단절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승환 고려대 법무대학원장은 “낙인찍혀서 사회관계 속에서 부적응한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응답자의 34.3%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주관식)엔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여겨질까 걱정됐다”, “너무 부끄럽고 사회의 범죄자란 꼬리표를 달게 됐다”, “가족과 일부 지인에겐 얘기했지만 다른 이들은 범죄자란 선입견 가질까봐 말 못했다” 등이라고 적었다.
취재팀이 심층인터뷰 한 피의자들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호소했다. 때문에 설문조사 말미에는 불안장애 평가 척도(GAD-7)와 우울증 선별검사 척도(PHQ-9)을 담아 응답자들에게 자가평가를 요청했다.
GAD-7은 7개 질문을 주고 응답별로 점수를 다르게 매겨 총점(0~21점)을 매긴다. 이번 설문에선 응답자 가운데 78.42%가 10점 이상의 불안증상을 겪은 것으로 평가됐다. 총점이 10점 이상이면 불안증상이 주의가 필요한 과도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PHQ-9 역시 총점이 10점을 넘기면 치료를 고려할 수준으로 판단한다. 이 평가에선 76.47%가 10점 이상이었다. 응답자의 22.54%는 최고점인 27점을 기록했다.
장 교수는 “보이스피싱 행동책에 엮인 이후 사회적 관계가 크게 축소된 청년들일수록 그렇지 않은 청년들에 비해 특히 불안감과 우울감이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출근길 지하철역. 불쑥 나타난 경찰들이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쌌다. ‘미란다 원칙’을 빠르게 읊조리곤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한 달간 했던 아르바이트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역할이었다고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합법적인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해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보냈는데…. 혹여나 주소를 보고 가족에게 찾아가 해코지라도 할까 겁이 났다. 이제야 안 것이지만, 기우였다. 그들에게 우리는 잡히면 버려지는 ‘병정’이었을 뿐이니까.
작년 겨울은 유독 찼다. 경기도 한 소도시에 있는 카페는 삶의 터전이었다. 하루 14시간씩, 13년을 일궈왔다. 코로나19에도 굳건히 버텼건만 정부가 연말에 발표한 집합금지 조치는 모든 것을 바꿨다. 잘 될 땐 하루 80만원이었던 매출이 0원이 됐다. 상가 2층에 위치한 까닭에 테이크아웃 손님도 없었다. 어린 딸을 둔 외벌이 가장으로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12월 한 달. 집합금지가 풀릴 때까지 딱 한 달만 가게를 닫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자고 마음을 먹었다.
코로나가 확산될 시기었기에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재 운송 알바. 1종 보통 운전면허 소유자 가능.’ 일용직 공고가 올라오는 네이버 밴드에서 구직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러나 막상 인사 담당자와 연락하니 “이미 알바생을 구해 마감됐다”며 “거래처 수금 업무를 할 사람이 필요한데 해보겠냐”며 제안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자재 운송 알바는 미끼였지만 그땐 재고 따질 여력이 없었다. 당장 가게 월세가 밀릴 위기였다.
장 실장이라는 사람은 자기회사가 저축은행과 거래하는 추심업체라며 “악성 채권을 싸게 사들여 시세차익을 남기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왜 고객과 계좌이체로 거래하지 않냐”고 묻자 “세금을 감면하기 위한 방법이며 절대 불법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순진하게 믿어버렸다. 합격 통보를 받곤 개인 신상 정보가 담긴 서류 여러 장과 셀카를 보냈다. 정 실장은 “금전을 다루는 업무기에 보안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 실장은 매일 고객과 만날 장소를 일러줬다. 한 달 동안 수도권에서 만났던 고객은 10명 남짓. 약속 장소에서 나가면 항상 회사 관계자와 통화 중이던 고객들은 전화기를 건넸고, “박동진입니다”라고 확인하면 “빨리 일을 처리하고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가볍게 목례만 할 뿐, 한 번도 고객과 말을 섞지 못했다. 여러 번 만난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그저 단골이라고 여겼다. 전달받은 현금은 지시대로 회사 계좌로 무통장 입금했다.
주로 수도권에서 일했으나 간혹 지방 출장도 있었다. 장 실장은 “세금 때문에 교통비는 현금으로 결제하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매번 현금 쓰기가 불편해 개인카드로 택시를 결제하고 KTX 탑승권을 끊었다.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 택시를 부르기도 했다. 경찰은 이 흔적을 따라와 체포했다. 장 실장은 잠적했다.
모두가 그랬다. 보이스피싱 총책은 중국에 몸을 숨기고 짜인 각본으로 병정만 부리면 된다고. 그 병정은 돈이 궁한 취준생, 실직자, 자영업자라고. 허탈했다. 멍청하게 속지 않았더라면…. 피해자들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한 코로나 탓을 해봤지만 무력감과 죄책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하루하루를 좀먹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살이 빠졌다.
피해금은 수억원. 합의금부터 마련해야 했다. 카페를 폐업해 집기를 팔았다. 한 단골손님이 “내 ‘인생카페’였는데 왜 문을 닫느냐“고 아쉬워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합의금을 벌기 위해 궂은 일을 시작했다. 집도 팔 생각이었다. 피해자들에겐 죄인, 가족에겐 보금자리조차 지키지 못한 가장이었다. 죽음으로만 속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진 곳에 죽을 자리를 봐뒀다. 아내와, 엄마, 장인, 장모에게 유서를 남겼다. 어린 딸에겐 차마 쓰지 못했다. 죽음에도 돈이 필요했다. 가장 값싼 방법을 택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잠든 딸 앞에 무릎을 꿇고 홀로 빌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이 사실을 안 아내는 “저 핏덩이 두고 죽으면 평생 죄짓는 거야”라며 가슴을 쳤다.
하루 24알의 정신과 약을 먹으며 버텼다. 죽기를 단념 한 건 우연히 마주한 풍경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 한 우산을 쥐고 나란히 걸어가는 부녀를 보며 먼 훗날 딸과의 미래를 떠올렸다. 과거에 붙잡혀 있지 말자고 스스로 약속했다. 어떻게든 합의금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주기로 했다. 꽃 한 송이를 사서 죽음을 기도했던 자리에 놓곤 스스로에게 명복을 빌었다.
일부터 구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새벽 2시에 퇴근한다. 주간엔 제조업 회사에서, 야간엔 물류센터에서 하루를 보낸다. 집에 도착하면 씻은 후에 새벽 4시까지 판사에게 보낼 자필 반성문을 쓴다. 변호사는 “그래봐야 소용없다”고 한다. 그래도 쓴다. 수면 시간은 4시간 남짓. 쉼 없이 도는 하루지만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곧 재판을 앞두고 있다. 반년이 지나서야 피해자 모두에게 합의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몇 달 간 모은 월급에 신용대출을 받아 충당했다. 장인은 평생 일군 재산의 일부를 선뜻 건넸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웠다. 변호사는 “전원 합의해도 실형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일반인도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되는 순간 강력하게 처벌받는다고 했다.
그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 “내가 나중에 커서 이해할 수 있을 때 말해줘”라고 어른처럼 말한다. 언제 이렇게 눈치가 빨라진 것인지….
혹시 몰라 딸에게 말했다. 아이는 그 말을 믿어준 것 같다.
어쩌면, 몇 년 뒤에나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보이스피싱 범죄에서 ‘현금수거책’이란 역할이 생긴 건 2017년 무렵이다. 이들은 미리 속여둔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돈을 받는다. 그리고 무통장 송금을 한다. 이른바 ‘대면 편취’ 유형이다.
한 형사의 눈에 이들은 사기범죄에 가담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잡히면 구속해 실형을 살게 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었다. 2018년, 2019년이 지나도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급증했다. 피의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저도 구인공고를 보고 일을 시작했다가 속았어요.”
피의자들의 진술과 정황이 대개 비슷했다. ‘구인공고를 보고 아르바이트를 구했을 뿐인데 그게 보이스피싱인지 꿈에도 몰랐다’는 주장. 어쩌면 현금수거책들도 ‘취업 사기’에 속은 이들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수사할수록 이런 심증이 굳어졌고 직접 연구에 매달려 논문까지 발표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홍순민(40) 서울광진경찰서 강력팀장(경감)의 이야기다. 10년 가까이 보이스피싱을 수사해온 그는 현역 형사 가운데 처음으로 현금수거책에 관한 연구논문을 썼다.
“‘보이스피싱 일 할 사람 구합니다’ 하면 누가 지원을 하겠어요. 그러니 정상적인 회사인 것처럼 꾸며 구인 공고를 올려요. 현금 수금업무, 은행 외근 알바 같은 문구로 올라와요. 저도 형사가 아니었다면 속을 수 있겠다 싶었죠. 검찰이나 법원에선 ‘미리 보이스피싱인 걸 의심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구조를 알 리가 없잖아요.”
홍 팀장은 현금수거책을 보이스피싱 말단 조직원으로 쉽게 간주하는 시각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직접 수사한 현금수거책들은 학생·주부 등 평범한 사람이었다”며 “하나같이 재정적 여유가 없는 구직자들로, 교묘한 취업 사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이 사람들은 조직원이 아니다’라고 백날 주장하기보다 정식으로 연구해 논문을 쓰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범죄학 석사과정을 거치며 지난해 두 차례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3월 교신저자로 참여한 ‘보이스피싱 범죄 전달책 특성에 관한 연구’에선 현금수거책의 인구사회학적 배경을 분석했다. 그가 경찰 내부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현금수거책의 73.5%가 청년(19~39세)이었으며 85.7%가 무직자였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67.3%), 구직 사이트(20.9%) 등을 통해 일을 구했다가 범행에 연루됐다.
이이서 ‘보이스피싱 범죄 전달책의 특성에 관한 질적 연구’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선 현금수거책의 피해자적 특성에 주목했다. 경찰에 붙잡힌 뒤 재판에서 사법처리를 받은 6명의 사례자를 심층 인터뷰 했다. 홍 팀장은 “해외 ‘근거이론’을 바탕으로 질문지를 구성해 수사자료와 교차 검증한 결과, 이들은 사기 가해자 특성은 없고 피해자의 특성이 발견됐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완전히 무고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형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긴 했지만 과연 구속수사해 중범죄자 수준으로 징역형을 선고해 처벌하는 게 맞느냐는 거죠. 현금수거책은 보통 사기죄나 사기방조죄로 처벌돼요. 그럼 사기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특성이 강해야 하는데 제가 직접 연구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홍 팀장은 논문에서 무고한 시민이 현금수거책으로 이용당하는 걸 막으려면 ▷공익광고 ▷구인광고 적격성 검증 ▷보이스피싱 구인광고 신고포상제 등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저 강력한 처벌만으로는 현금수거책이 등장하는 사건을 줄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해마다 현금수거책으로 검거돼 징역형을 사는 사람들이 수천명입니다. 정부가 보이스피싱 범죄 가담 방지에 관한 대대적인 홍보를 해야 현금수거책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알바 잘못했다가 징역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야 합니다.”
그가 논문을 냈지만 경찰조직이나 학계에서 달라진 건 없었다. 지극히 ‘소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주류적 입장이기에 반응이 전혀 없었다”며 “일부 수사관이나 법조인 입장에선 기분 나쁠 수 있는 논문이라는 걸 예상하고도 썼다”고 했다.
하지만 현금수거책 피의자들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취약한 상태라면 누구나 엮일 수 있기에 홍 팀장의 주장은 귀 기울일 만하다.
“비대면 면접과 개인정보 요구, 이 두 가지를 확실히 경계하세요. 대면 면접 없이 하는 알바는 없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든, 신분증이든 전화기로 찍어서 카톡으로 전달하라고 하는 알바도 없습니다. 제출하려면 직접 만나서 제대로 된 회사인지 확인부터 해야 해요. 쉽게 가족 인적 사항을 통신매체로 넘기는 건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